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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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거 결제] 11월 29일(음력 10월 15일) 동안거 결제 주지스님 인사말씀
주지 계호스님 2020-11-29
진관사 불자여러분! 진관사TV 구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죠!? 여러분들께서 보내주신 관심과 성원 속에 진관사TV가 많은 구독자 여러분을 뵙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경자년 동안거 결제일입니다. 오늘부터 내년 정월 보름까지 동절기 3개월 동안 참선수행에 전념하는 정진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나와 가족은 물론이고 세상의 모든 생명이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하게 느끼는 해였습니다. 나의 위생과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킨는 것은 수행정진과 참 많이 닮았습니다. 게으르지 않고, 스스로 정직하게 실천하며,주변과 조금 거리를 유지하면서 집착을 멀리하면서,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인연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코로나19로 불편함이 많겠지만 어려움은 그 인연에 잘 순응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길을 찾게 합니다.우리 불자님들과 구독자 여러분들 각자의 생활들을 조금 단조롭고 정갈하게 하시면서 자신을 만나고 배려하는 기도 수행으로 동안거를 함께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착한 일을 한 가지씩 하시는 것도 좋은 기도법입니다. “다 맞다, 다 좋다, 다 옳다”는 긍정의 마음으로 먼저 용서하고 수용할 수 있는 동안거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코로나19로 희생된 모든 분들이 왕생극락하시고, 감염된 분들은 속히 완쾌하시며, 모든 분들이 방역을 잘 지켜서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정진으로 이 세상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xhDGt39ywM&t=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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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11월 28일 5재 법문
종범스님 2020-11-28
금일 도량 세연지고오칠지신 천혼간도재자지심제청 지심제수 至心諦廳 至心諦受 일체제법성一切諸法性이 무생역무멸無生亦無滅이여 기재대도사奇哉大導師 자각능각타自覺能覺他로다 나무아미타불(화엄경, 수미정상게품) 불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해탈(解脫), 열반(涅槃), 극락(極樂), 이걸 가르치거든요. 해탈은 삶과 죽음이 속박에서 다 벗어났다, 이런 뜻이고. 열반은 삶과 죽음이 없다, 생멸이 아니라 적멸이다, 이런 말이에요. 극락은 고통은 없다, 즐거움뿐이다. 이게 극락인데, 그럼 해탈, 열반, 극락 이런 것이 어떡해서 생겼나. 보리(菩提), 깨달음, 깨달음으로 생긴 것입니다. 보리의 해탈이고, 보리의 열반이고, 보리의 극락. 무생역무멸(無生亦無滅),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는데, 법성(法性)은, 성품 성자,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 기재라(奇哉), 신기하다, 기재대도사께서, 부처님께서 그걸 자각하시고, 스스로 깨달으시어 능각타(能覺他)하셨다, 능히, 능자는 한다라는 뜻인데, 다른 이를 깨우치셨다. 그래서 법상(法相)은 유생유멸이고, 또 법성(法性)은 무생무멸이라. 삼세제불三世諸佛 성최정각成最正覺 불신충만佛身充滿 십방법계十方法界 각지보조覺智普照 상방광명常放光明 장엄찰해莊嚴刹海 중중무진重重無盡 그 생기고 사라짐이 없는 법성을 깨달으신 것을 보리라고 합니다. 그 보리가 최상정각(最上正覺)이라고 해서,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이라고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합니다. 최상정각이란 소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말입니다. 그 보리는 그냥 해탈이 아니라 해탈을 아는 지혜가 있어요. 그걸 정각대지(正覺大智)라고 하는데, 바르게 깨달은 큰 지혜. 열반을 아는 지혜가 있어요. 정각대지. 또 극락을 아는 지혜가 있어요. 정각대지. 그래서 해탈도 알고, 열반도 알고, 극락도 아는 정각대지인 거예요. 여여법성如如法性 청정법신淸淨法身 각지보조覺智普照 원만보신圓滿報身 원력화현願力化現 백억화현百億化身 그래서 부처님이 표현을 할 때, 양쪽 손을 이렇게 맞잡고 계신데요, 이게 뭐냐. 양쪽 손을 맞잡는 의미는 여여법성(如如法性), 여여해요. 이 우주가 생기기 전이나, 이 우주가 생긴 중간이나 우주가 사라진 다음에나 여여해요. 그냥 같아. 그걸 법성이라고 한다 했거든요. 그러면 정각대지는 여여법성을 알고, 세간 생멸도 알고 양쪽을 다 살핀다고, 깨달은 지혜를 나타내는데요. 두 손을 맞잡고 있는 그 의미를 여여법성(如如法性) 청정법신(淸淨法身)이다. 청정이란 그것뿐이다, 섞인 게 없다란 거거든요. 손을 이렇게 펴는 것을 각지보조(覺智普照), 각지가 보조라. 정각지혜가, 깨달은 지혜가 널리 비추어서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런데 그것은 깨달은 보답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원만보신(圓滿報身)이라고 해요. 깨달은 보답으로. 깨닫기 전에는 그걸 몰라요. 원만이란 모자람이 없는, 보답으로 얻은 몸이다. 이게 정각지혜거든요. 양쪽으로 이렇게 보신불인데, 각지보조覺智普照 원만보신불圓滿報身佛. 여여법성如如法性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 그 다음에, 이렇게 손을 올린 모습이 있어요. 이건 두려움이 없는 걸 보이는 모습이라고 <시무외, 무외(無畏)를 보인다.>고 하는데, 그건 뭐냐 하면, 고통이 없다, 무고(無苦), 깨달음의 세계에는 고통이 없다, 나에겐 아무 고통이 아니다. 그리고 한 손을 올리는 게 있어요. 유락(有樂)이라, 즐거움이 가득하다. 무고유락, 고통은 없고, 즐거움은 가득하다. 이걸 보이는 거거든요. 고통이 없다, 무고, 두려움이 없다. 이렇게 위로 손을 올리는 것은, 즐거움이 가득하다. 여원(與願), 원하는 대로 다 준다. 이게 뭐로 이루어지냐 하면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어져요. 깨달음을 통해서 지혜가 이루어지고, 그 지혜로 해탈이 이루어지고, 열반이 이루어지고, 극락이 이루어진다. 처음부터 이런 게 아니에요. 처음에는 손을 무릎에 얹고, 손가락이 땅에 닿을 정도로 누르는 모습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건 깨닫기 전 모습인데, 깨닫기 전에는 형상에 자꾸 쫓아가서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의식, 관습이 있는데, 형상을 추종해서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의식 관습을 마군(魔軍)이라고 해요. 마, 형상 추종. 욕망 충족. 이거는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형상은 사라지고 욕망은 채우면 또 채워야 하기 때문에 안 채워져요. 그래서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꿈과 형상은 아무리 쫓아가 봐도 사라져버려요, 무상해서. 그러니까 안 돼요. 뭔가 채우면 채우는 동시에 딴 욕망이 또 생겨서 욕망은 영원히 충족하는 것이 불가능해요. 그런데 태어나면서 습관적으로 형상 추종, 욕망 충족을 위해 노력을 하게 돼요. 그걸로 온 고통이 생기는데, 그걸 항복시킨다. 그게 항마인(降魔印)이에요. 마라는 건 영원하지 않은 걸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쫓아가는 건데, 그걸 눌러버려요. 무릎 위에다 손을 딱 놓고 누르는 거예요. 그리고 한 손은 올려요. 그것도 무릎 위에 얹은 상태로 올려요. 그거는 성취소원,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 그 표시거든요. 군마항복, 마군은 항복시키고, 성취소원, 원하는 바를 성취시킨다. 그래 가지고 깨달음을 이루면 무고, 아무 고통이 없다, 유락, 즐거움은 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보리 하나로 모든 게 다 이루어지는 거지요, 보리 하나로, 깨달음. 왜 그러냐. 이 세상에는 영전세계, 영후세계가 있는데, 한 생각 일으킨 뒤의 세계가 세간거리에요. 생멸, 삼세, 나고 죽고, 과거, 현재, 미래가 있고. 생멸, 삼세는 한 생각 일어난 뒤의 일이라고 해서 영후세계라고 해요. 또 무생무멸 여여법성세계는 한 생각 일으키기 전의 세계라고 해서 영전세계라고 해요. 생각 영자, 앞 전자, 영전세계. 영전세계가 극락세계예요. 영후세계가 생멸세계고. 그런데, 생각들이 많은데, 이게 다 여여법성인데 한 생각을 딱 일으켜서 좋다, 나쁘다라는 분별을 일으키게 돼요. 거기서부터 세간법이 펼쳐지게 되는 거예요. 영후세계. 그래서 이 우주만상에 좋다, 나쁘다라고 하는 애증, 싫어하고 좋아하는 애증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물들 염자, 들어갈 입자, 염입(染入)이라고 하는데요. 또 보면 애증을 안 일으키면 극락세계에요. 근데 좋고 나쁘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그게 생멸세간이 되는 거예요. 한 생각이 이 허망한 현상세계에 애증심으로 물들어서 거기에 빠지게 되면, 거기에 몰입하면 거기서 고통이 오는 거예요. 염입이라고, 염입. 근데 한 생각을 딱 거두어서 한 생각 이전으로 들어가면 그게 여여법성인데, 생각에서 생각 이전으로 들어가는 거를 증명서라는 증자가 있는데요, 증득할 증자, 들어갈 입자, 증입(證入)이라고 해요. 세간법으로 물드는 걸 염입이라고 하고, 불생불멸 법성법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걸 증입이라고 하는데, 그 염전일법(念前一法), 한 생각 이전의 한 법, 그게 분명해요. 찰라, 찰라왕생. 극락세계는 뭐 수속 밟고 교통 준비해서 가는 게 아니라 한 생각이 불생불멸 법성세계로 증득해 들어가면 그게 극락세계에요. 생로병사 희노애락이 왜 생기느냐. 한 생각이 허망한 형상세계에 애증심을 일으켜서 물들면 그게 생로병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염입이냐 증입이냐. 마음이 형상에 물들면 생멸이고 마음이 한 생각 이전으로 증득해 들어가면 극락이다. 그 세계로 모셔 드리는 게 이 재 지내는 거예요. 아주 간단해요. 그래서 항상 염전일도(念前一道), 한 생각 이전의 한 도, 이걸 보려고 하면, 막대기 주장자가 나오는데, 책도 보이고, 염전일도, 한 생각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이전에 한 도 없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법성이다 이거죠, 염전일도로. 그걸 성전일구(聲前一句)라고 해요. 한 소리 내기 전 한 구절. 소리가 나오면 염의 세계일 수 밖에 없어요. 좋다 나쁘다, 있다 없다 이것이 전부 한 생각 이후의 세계거든요. 그래서 한 생각 일으키기 이전에 한 구절이 있는데, 그 구절은 증득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증입이에요, 증입. 떡 하니 한 생각 이전으로 들어간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세간법. 한 생각 이전으로 들어가면 법성법. 법의 본성이다. 근데 법성도 훤히 알고 세간도 훤히 알아서, 원만보신은 양쪽으로 손을 펼치고 계시는데요. 세간법도 알고 법성법도 알아가지고. 아주 간단해요. 순간 극락 체험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순간 극락 체험. 한 생각을 딱 하면서 단 1초만이라도 한 생각 이전으로 돌아가면 거기가 극락세계거든요. 그런데 한 생각 이후로 펼쳐져서 그냥 자재하면 괜찮은데, 좋아하지도 말고 싫어하지도 말고 오면 받아들이고 가면 내버려둬요. 그럼 해탈이에요. 가면 내버려 둬요. 물이 흐르듯이.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자재라는 게 그런 거예요. 자재. 형상세계에 애증과 속박을 받질 않아요. 그럼 그게 해탈이거든요. 마음이 복잡하고 그러면 어떻게 해결하나. 한 생각 이전으로 들어가야만 마음이 환해지고 편안해져요. 그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딴 생각을 한다든지 하면 생각만 바뀌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편안하고 환한 건 없어요. 혼자 좀 따분하고 지루하고 답답하다 이게 마군인데, 따분하게 느끼는 생각, 답답하게 느끼는 생각,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별로야, 별로.” “뻥이야, 뻥” 그 생각 때문에 다른 일을 또 벌리고 그 일 벌림의 결과로 고통이 오는 거거든요. 그럼 어떻게 되냐. 지루하고 따분하고 답답하고. 마음을 다 걷어들여서, 생각이라는 게 뭔가 돌아보면 없어요, 생각이. 구름과 같아서, 구름이 실체가 없고, 자세히 보면 허공뿐이에요. 그래서 구름에서 허공으로 들어가는 것이 한 생각이 한 생각 이전으로 들어가는 건데, 아무것도 없으면서 초롱초롱하고, 이걸 적지(寂知)라고 하는데, 고요 적자, 알 지자, 초롱초롱하게 알면서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게 여여법성이거든요. 초롱초롱 아는 게 모든 걸 살피는, 생멸을 아는 그런 지혜인데, 이걸 처지비처지(處智非處智), 곳 처자, 처를 아는 지혜다라고 해서 곳 처자, 처지라고 해요. 법성을 아는 지혜를 비처지, 처와 아닌 걸 아는 지혜라고 해서 아닐 비자, 곳 처자 비처지라고 해요. 이 비처지는 적멸, 실상, 여여 그것뿐이에요. 여기엔 시간도 범접할 수가 없고, 물건도 범접할 수가 없고, 생각도 범접할 수가 없어서, 시간도 없고, 물건도 없고, 생각도 없는 성전일구, 한 말소리 이전의 한 말, 염전일도, 한 생각 일으키기 이전의 한 도, 그걸 살피는 게 비처지거든요. 처가 처가 아님을 살피는 게 비처지. 또 염세계 세간법. 일체 세간법을 다 살피는 게 처지라고 했고요. 그러면 부처님이 깨달은 방법은 뭐냐. 능엄경 제 6권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는데, 정극광통달淨極光通達하면 적조함허공寂照含虛空이니라 각래관세간却來觀世間하니 유여몽중사猶如夢中事로다나무아미타불(능엄경권6) 반야심경에 보면 보리살타도, 보리살타는 보살인데, 의반야바라밀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구경열반하고, 가장 깊은 열반에 들었고, 삼세제불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깨달은 분들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반야바라밀이에요. 보리살타도 보살이 되는 이유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보살이 되고,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삼세제불이 된다 이거거든요. 그럼 반야바라밀다는 뭐냐.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반야의 공덕을 이야기 하는 거고, 피안이라는 거, 한 생각 저쪽 세계, 그쪽으로 간다는 소리에요. 반야바라밀다가, 한 생각 저쪽세계로 간다. 세간법에서 법성법으로 간다 이 말이죠. 그래서 도피안, 피안에 도달한다. 그럼 뭘로 도달하느냐. 반야로 도달한다. 반야는 뭐냐. 관조(觀照)예요. 볼 관자, 볼 조자. 조명이라는 조자가 있는데, 보는 거예요. 뭘 보느냐. 물건도 보고, 내 몸도 보고, 내 생각도 보는데, 물질과 자기 몸과 생각을 그냥 보는 거예요. 그리고 생각을 일으키질 않아요. 그걸 관조라 하고, 보기만 하지 생각을 안 일으킨다. 이게 반야에요. 전부 이 관조 반야에 의해서 보살도 되고 삼세제불도 되요. 싯다르타는 마야부인하고 정반왕이 부모가 되지만, 석가모니는 반야가 불모(佛母)예요. 반야가 부처님의 부모예요. 부처님은 반야에 의해서 태어나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에 의해서 태어나는 게 아니고요,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에 의해서 태어나는 게 아니에요. 삼세제불은 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아뇩다라샴막샴보리를 얻었다. 관조, 생각은 멈추고 보기만 한다. 생각을 멈출 필요도 없이 그냥 보면 돼요. 멈추려고 하는 것도 생각이에요. 생각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생각을 멈추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보면 생각을 멈춰지게 돼요. 저게 뭔가, 동서남북 생각을 일으키면 못 보게 돼요. 여행하는 처소에서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야, 좋다’ 그러면 못 보는 거예요. 그냥 봐야 보이는 거예요. ‘야! 좋네,’ 그러면 ‘어제와 똑같네.’ 그러면 하나도 못 보고 가는 거예요. 그냥 딱 보기만 해야 보이지, ‘아름답네, 최고네,’ 이건 전부 생각으로 그 광경을 뒤덮어서 안 보여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그냥 보기만 하면 생각은 이미 그쳤거든, 보는 순간에. 그러면 그 보여지는 물질이 염전일법이에요. 생각 일으키기 전에 한 법이에요. 내 몸도 염전일법이고, 생각 일으키기 전에 한 법이요, 내 생각도 염전일법이고, 그게 극락세계예요. 염전일법으로 돌아간다. 염전일법으로 들어가는 건을 증입이라고 한다. 증득해 들어간다. 보이고 몸 느끼고, 생각으로 빠지고 하는 것은 염입이다, 물들어 들어간다. 물들어 들어가서 생로병사가 있는 거고, 증득해 들어가는 것은 극락세계다라는 거죠. 생각을 멈추고 보고 또 보고 하면, 생각에 찌들어 살던 물든 생각이 맑아지고 맑아지고 맑아져서, 맑아진 게 극에 달하여서, 이게 정극(淨極)이라고 해요. 깨끗할 정자에 극치라는 극자. 정극을 하면 어떻게 되냐. 광통달(光通達)이라. 빛이, 지혜의 빛이, 통달이란 밝을 통, 밝을 달 그런 뜻인데, 확 밝다는 거예요. 그 순간을 대웅이라고 해요. 크게 웅장하다. 생각에 묻혀있던 지혜가 생각이 맑아짐으로 인해서 확 드러나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크게 웅장하다, 대웅. 대광명이라고도 하는데, 절에 가면 대웅전, 대광명전, 극락전 그런 게 있잖아요. 들어오는 문을 해탈문. 다 똑같은 얘기에요. 깨달음의 세계를 얘기하는 거거든요. 생각이 고요하고 고요해서 마지막에 지혜에 들어가서 확 밝아질 때, 웅장하다, 대웅이다. 그럼 어떻게 되냐. 적조가 함허공이라(寂照含虛空), 고요히 비추는 지혜가 온 허공을 다 삼켜버려요. 삼킬 함자가 있거든요. 허공을 다 삼켜요. 끝이 없다. 각래관세간却來觀世間, 그런 상태로 죽고 사는 세간법을 다시 보니, 유여몽중사(猶如夢中事)라, 마치 꿈속의 일과 같더라. 꿈이란 건 깨고 나면 없는 거예요. 꿈속에서는 아주 분명 분명한데, 깨고 나면 하나도 없어요. 어떤 사람은 꿈 해몽을 한다는 소리가 있는데, 다 헛거예요. 꿈은 이미 없어졌는데, 없어진 걸 해석해서 뭐 할 거예요. 꿈이라는 것은 없어진 다음에 꿈이에요. 한참 꿈이 있을 때, 꿈속에서는 꿈인 줄 모릅니다. 다 없어진 거 해석해서 뭐 할 거냐. 그러니까 천 가지 만 가지 많은 길이 있지만, 원칙은 딱 하나, 생각을 멈춘다. 관조, 본다. 맑히는 방법은 뭐냐. 그냥 본다. 불모인데, 부처님의 어머닌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머니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고 아버지도 있어야 하는데, 아버지를 방편이라고 해요. 공덕도 짓고, 여러 가지 몸에 좋은 일도 짓고, 온갖 좋아지는 인연을 만드는 걸 방편이라고 하는데, 극락세계는 온갖 공덕의 아버지와 조용한 생각의 어머니가 만나서 극락세계로 가는 거거든요. 공덕과 정심으로, 깨끗한 마음과 공덕의 방편으로. 방편의 아버지가 없으면 생각이 맑아지질 않아요. 계속 자극을 받고 장애가 생겨서, 아이가 태어날 때는 아버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애를 낳는 건 아니에요. 어머니가 낳거든요. 어머니는 깨끗한 마음이에요. 염심이 아니라 모든 마음에 정심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항상 부처님은 각지가 보조라(覺智普照), 깨달은 지혜가 널리 비추니까 뭐 선정에 들고 선정에 나오고 그런 게 없어요. 항상 그대로예요. 상정제불이라고, 항상 정해주는 부처님이라고, 범부들은 늘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에 입정을 해야 돼요. 정에 들어야 해요. 범부는 입정이 있지만, 제불은 입정이 없다. 상정이라. 항상 선정에 있는 거지요. 왜냐하면 물질을 보나, 생각이 떠오르나, 자기 몸이 생로병사를 느끼나, 거기 애증 분별이 없어요. 분별없는 게 선정이거든요. 선이나 정이나 같은 소리예요. 선이라는 말은 인도말인데, 한자로 표현하면 정이라고 해요. 선과 정은 틀린 말이 아니라 같은 말이에요. 같은 소리가 뭐냐. 자기 생각이 떠올라도 절대 거기 물들어 들어가지 않아요. 물질을 봐도 물들어 들어가지 않고. 자기 몸을 봐도 물들어 들어가지 않고. 물들어 들어가면 어떻게 되냐. 몸이 건강할 수 있겠나, 잘 될 수 있겠나. 몸에 따르는 걱정인데, 그건 물들어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 걱정, 사람에 물들면 사람 걱정하고, 물질에 물들면 물질 걱정하고. 몸 걱정, 물질 걱정, 사람 걱정. 이게 범부의 번뇌망상이에요. 평소에 산란했던 마음을 다 가라앉히고 정에 듭시다 죽비를 딱딱딱 치는 게, 입정에 안 들면 조금이라도 생각을 멈추는 기회를 잡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하는 거거든요. 그 지혜가 항상 밝은 지혜면 항상 뭐.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일어나는데 자기가 자기 생각에 딸려가지를 않아요. 인간의 생각은 좋은 생각이 기억되는 게 아니고, 나쁜 생각만 기억이 돼요. 그래서 과거 생각하면 99%가 기분 나쁜 생각이에요. 근데 깨달은 분들은 좋은 생각이 떠오르거나 나쁜 생각이 떠오르거나 거기에 물들어 들어가지를 않아요. 그러면 떠올랐던 생각이 금방 없어져요. 거기에 물들어가면 기분 나쁜 생각이 한참 가요. 그런데 인간의 기억은 나쁜 것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억을 자꾸 떠올려서 좋을 수가 없다. 저 사람 속에 많은 기억이 들어있는데, 그 기억 속에는 나쁜 게 90%, 좋은 게 10% 밖에 안 돼요. 그건 쫓아가면 안 되는데, 계속 그걸 쫓아가면서 살아요. 그 생각은 공허하고 공허해요. 염정, 생각을 보려고 하는데, 지발, 지혜는 일어난다. 염정지발하는 걸 깨달음이라고 해요. 생각을 보려고 하는데, 지혜가 일으킬 발자, 출발한다는 말도 돼요. 그게 대웅이고 대광명이에요. 그게 원만보신. 지혜의 몸이다. 순간 극락 체험 같은 거 아주 중요해요. 단 1초만이라도 생각을 멈추고 이러고 있으면, 1초 극락이 되는 거예요. 1분이 되면 입문경지에 들어가고, 5분 지나면 고수에 속해요. 생각이 얼마나 복잡하고 활동적인지. 그럼 10분을 생각을 멈춘 상태에서 관찰하게 되면 대단히 상근기에 속한 사람이거든요. 1시간 할 수 있다, 그러면 아주 대단한 거예요. 근데 처음에는 30초 안 돼, 절대 안 돼요. 10초도 안 돼요. 10초 극락 체험을 한다, 30초 극락 체험, 1분 극락 체험, 와 이거 엄청난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관조 수행과 관조 수행이 잘 될 수 있도록 방편 공덕. 방편 공덕이 아버지가 되고 관조 정신이 어머니가 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데, 그것이 보리다, 이거죠. 그럼 어떻게 되냐. 일체제불찰一切諸佛刹 장엄실원만莊嚴悉圓滿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 일체제불찰一切諸佛刹, 화엄경 보살문명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깨달은 분들이 보신 모든 세계는 전부 극락세계이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부처님의 나라가, 일체제불찰, 장엄실원만(莊嚴悉圓滿)이라. 없는 거 없이 원만하고 가득하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이면, 생각생각이 보리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처처가 안락국이라(處處安樂國), 곳곳이 다 극락세계다. 이 법문은 경전에 있는 말씀이지만, 제사 지낼 때마다 맨날 하는 소리여,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 보리심 반대는 뭐냐 하면 생멸심이에요. 생멸심이란 뭐냐 하면 물들어서 살아가는 거예요.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 그런데 이렇게 공력을 많이 일으켜서 재를 지내시고, 축원을 하시고 이런 것이 다 공덕인데요. 이게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한 순간이라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한순간이라도 선정에 들어 생각을 멈추고 바라보면 그게 어머니인데 정신증유로, 깨끗한 마음을 증득해 들어가는 노력으로 극락왕생을 하는 거지요. 오늘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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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니기도] 11월 13일-15일 천독다라니기도 회향법문
가섭스님 2020-11-15
마하반야바라밀 따라해보세요.마하반야바라밀네. 반갑습니다. 오늘 다라니기도 열심히 하셔서인지 몰라도 얼굴이 다 밝고 맑아요. 진관사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늘 같은 느낌인 거 같아요. 정갈하다. 이 느낌은 올 때마다 느끼는 거 같습니다. 올 초에 한 번 뵙고, 코로나가 창궐해서 1년이 다 되도록 끝나지 않고 있어요. 요즘에는 코로나 종식 발원을 많이 하지요, 절에서도. 종식이라는 말이 경전에서 많이 나오는 말 중 하나입니다. 끝내 마친다, 쉰다는 말이거든요. 종식이라는 말을 언제 쓰냐 하면 우리 마음이, 마음의 번뇌가 끝나서 쉬는 것, 그때 종식이라는 말을 많이 써요. 그래서 우리가 코로나를 조속하게 종식하려면 사실은 마음의 번뇌를 놓으셔야 합니다. 코로나가 창궐하게 된 원인을 죽 따라가 보면 거기에는 인간의 욕망이 있어요. 그 욕망이 촉발돼서 코로나가 온 거란 말이에요. 코로나가 와서 사람들의 움직임이 좀 적어지니까 대번에 온 효과가 아이러니하게도 바다 수질이 좋아져요. 그리고 환경이 좋아진다고 해요. 바다 수질이 좋아지니까 없던, 사라졌던 물고기들이나 동물들도 많이 보이게 되고. 인간의 움직임이 주니까 자연이 회복된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서 그동안 환경이 많이 파괴되었고, 천년에 한 번씩 올라가는 온도가 100년 만에 올라갔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의 온도보다 1.4도가 올라가면 엄청난 위기가, -지금의 코로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더 큰 위기가 온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바로 기후 위기인데, 결국은 이 코로나를 종식하려면 여러 가지, 마스크도 열심히 해야 하고 하겠지만, 우리 마음을 쉬어야 해요. 불자들부터 자기 마음을 내려놓아서 마음의 번뇌를 쉬는데, 번뇌만 쉬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정생활에서 그 마음의 욕망을 내려놓으면서 조금 적게 사는 방법들은 실천해야 합니다. 다라니를 열심히 해서 원하는 게 있겠지만, 그 원하는 것은 기도한 만큼 이루어지기 때문에 걱정들 마시고, 그건 다 불보살님이 가피를 주시니까, 이제는 우리가 정말로 생명을 연장하는 실천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 내가 사랑하는 아들, 딸, 손자, 손녀를 위해서 이제 마음의 번뇌를 쉬는데, 그 번뇌를 쉬는데 있어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조금 적게 사는 방법, 그걸 스몰 라이프(small life)라고 하는데, 적게 사는 방법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게 보살도에요. 이 시대의 보살도가 뭐냐. 그건 바로 환경을 살리는 일입니다. 단언컨대 부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아마 첫 말씀으로 이 말씀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뭐냐 하면 “환경을 지켜라.” 이건 굉장히 큰 위기가 와있다. 그래서 코로나를 빨리 종식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환경을 되살릴 수 있는 실천 방법들을 좀 한가지라도 실천해야 합니다. 그건 조금 나중에 뒤에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환경 안에 존재하는데, 존재라는 거 자체를 바르게 이해해야 되는데, 우리는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거냐.’라는 의미에서 말씀을 드리고, 또 존재를 잘 이해한 다음에 우리가 기도한 다라니의 공덕이 어떤 것인지 좀 알아보도록 할게요. 다라니의 이름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여러분도 이름이 다 있지요. 보살님은 법명이 어떻게 되세요. 진여행입니다. 본명도 있지요. 누구 엄마라고도 불리죠. 누구 딸이라고도 불리죠. 그런 것처럼,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거든요. 다라니도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데, 이름을 잘 이해하면 다라니라는 게 이렇게 수승한 공덕이 있구나를 알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을 좀 소개하고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 마무리를 질까 합니다. 우선 존재라는 것은 왜 이해해야 되느냐 하면 이 존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게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과 맞닿아 있기 떄문입니다. 우리가 절에 10년, 20년, 30년, 40년, 제가 조금 있으면 출가한 지 30년이 되는데, 저보다 절랍이 오래된 분들이 있잖아요. 절랍은 절에 다닌 햇수. 우리는 법랍이라고 하는데, 절랍이 40년 돼도 자기의 신앙에 변화가 없어요. 늘 바라는 게 같기 때문에 늘 고민거리가 같아요. 걱정거리가 같아요. 존재라는 것은 바르게 이해하면 근심이 떨어져 버려요. 우리가 근심을 털어버렸잖아요. 걱정거리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부처님은 존재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를 바르게 이해함을 통해서 근심을 여윈 분이에요. 근심에서 승리하신 분입니다. 부처님이 10가지 이름이 있지만, 그 10가지 이름 중 우리가 잘 쓰진 않지만, 많이 나오는 이름 중의 하나가 <승리자>란 이름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부처님을 부를 때 <승리자여>라고 부릅니다. 그 승리자란 번뇌에서 이긴 자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일상을 들여다보면 번뇌에서 이기는 것보다는 번뇌에 질 때가 많아요. 마음이 괴로울 때 마음의 괴로움을 이겨내기보다는 굴복되거나 내지는 잊는다는 마음으로, 좀 더 있게 말하면 마음을 비운다는 표현으로 툭 하고 넘겨놓지요. 넘겨놓는 건 쌓아놓는 거예요. 그러면 그 괴로움의 실체는 같은 환경이나 같은 대상이 나타나거나 같은 인연을 만나면 또 올라옵니다. 더 강하게, 그전보다 더 괴로워요. 그래서 이 존재라는 것을 바르게 이해해서 번뇌를 맞닥트리면 이겨야 됩니다.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다라니를 열심히 독송하는 것도 원하는 마음, 바라는 것을 이루는 것도 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승리하는 마음을 얻는 거예요. 여러분 번뇌에 승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번뇌에 지고 말아요. 내지는 넘겨놓고 쌓아놓기 바쁘죠. 그리고 잊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잊는 게 아니죠. 부처님처럼 번뇌에 승리자로서 살아가려면 존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데, 존재라는 말은 이게 번역이 잘못돼서 그렇게 쓰고 있지만, 원래는 <있다>라는 뜻이잖아요. <있다>. 존재는 한자로 있을 재, 在. 이것을 <있다>라고 해요. 뭐뭐가 있다. 근데 옛날 한글에 보면 <있다>가 <ㅆ>이 아니라 <ㄷ> <읻다>에요. 그 어원을 보니 나무 목(木)이었어요. 있다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걸 말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걸 다 있다라고 하잖아요. 여기에 컵이 있고, 부처님이 앉아계시고, 다 있는 거죠. 그런데 그 있는 거의 실체, 원리가 뭐냐 하면 변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변한다는 거 자체가 어디서 변하냐 하면 시간 속에서, 공간 속에서 변해가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은 존재의 그런 이치가 있는데, 공간과 시간속에서 변하는 거에 대해 자꾸 거부해요. 그러다 보니 괴롭죠. ‘아, 변하는 거야.’ 변하는 건데 그 변화 속에서 변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다음에 존재를 안고 있죠. 진관사 도량에 가을이 내려앉아있죠. 지금은 초겨울에 들어가려하죠. 그런데 이 가을에 봄이 들어있고, 여름이 들어있고, 겨울이 들어있는 거죠. 가을 안에서 봄도 보고, 여름도 보고, 겨울도 볼 줄 아는 게 수행자의 관점이에요, 시간에 대한. 우리는 지금 가을에 저 낙엽이 떨어지는데, 떨어지면 영양분이 되어 썩잖아요. 그런데 그 장면을 그대로. 예를 들면 우리의 마음 상태가 그렇다는 거예요. 우리 마음은 늘 그렇게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화해가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해요. ‘나는 변하는 존재다’라는 것을 인지해야 해요. 내가 변할 때 상대도 변하죠. 남편도 변하고 자식도 변하고, 변한다는 것만 제대로 한 번만 기억해도 마음이 굉장히 편해집니다. 우리가 괴롭다고 할 때, 마음이 번뇌가 가득하다고 할 때 가만히 들여다보면, 뭔가 잡혀있어요. 아니면 뭔가 끄달려 있어요. 재물에, 명예에, 내지는 관계 속에서 끄달립니다. 그걸 다 내려놓으면 굉장히 편해지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마음들을 자꾸 안보고 형상적인 것에 자꾸 매여서 거기에 자기 행복의 관점을 두고 찾다보니까 허전해요. 우리나라사람들은 행복지수가 낮다고 해요. 제가 적게나마 외국을 다녀보면,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언감생심이지만, 예전에 좀 다녀보면, 우리나라만큼 잘 사는 데도 없어요. 근데 행복지수가 낮다고 해요. 그 원인이 뭘까? 미디어를 통해 기대수치는 굉장히 높아져 있는데 자기생활은 거기에 비해서 떨어져 있는거죠. 그리고 계속 외관만 바라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거에 마음이 딱 걸려서, 욕망에 마음이 걸려서 괴롭게 사는 거예요. 이제는 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해요.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 존재라는 실체를 알고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거예요. 외국 여행 안 가면 우울증 걸려서 괴로울 줄 알았는데 안 가도 살아지잖아요. 집에만 있으면 뭔가 큰 일이 날 거 같았는데, 막상 있어보니까 지낼만하죠. 어떻게 마음 먹느냐에 따라서 이 마음 씀씀이를 이제 배워야 됩니다. 저 허공에 새가 암만 날개짓을 해도 허공을 벗어날 수 없듯이, 저 물속의 물고기가 암만 헤엄을 쳐도 물을 벗어날 수 없듯이, 중생은 마음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마음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고 공부해야된다. 고 말씀을 드립니다. 요즘 드라마 중에 핫한 드라마가 있어요. <애로부부>라고, 왜 스님이 애로부부를 이야기하지? 당황스런 기색이 역력한데, 이 애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에로가 아니에요. 애로사항할 때 애로에요. 애자가 막힐 애자(隘路)에요. 길이 막혔다는 뜻입니다. 그걸 보면, 부부사이에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해결되는 걸 보여주는 프로그램인데, 좀 비효율적인 것이 많이 나와서 내용이 좀 그래. 그런데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했는가 하면 이 애로 때문입니다. 애로라는 건 길이 막힌다는 건데, 부부지간에 길이 막히는 것은 가장 첫 번째가 뭘까요? 맘이 멀어지는 겁니다. 마음이 멀어지면 길이 막히는 거예요. 한자로 길 로자와 길 도자가 있는데, 길 로자는 보통 현상적인 것에 많이 써요. 길 도자는 마음을 닦는다고 할 때 써요. 그런데 현상적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막힌 거잖아요. 부부만이 아니라 불자들도 마찬가지예요. 마음을 들여다 보지 않고 다라니기도하면서도, 물론 각자가 바라는 게 있겠죠. 그런데 저는 현상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구하는 것은 기도를 간절히 하면 이루어진다니까요. 우리는 뭘 해야 되느냐, 이 자리에서. 내 마음을 관하는 것을 연습해야 해요. 적어도 진관사 108독, 천독 42수 기도할 동안만이라도 내 마음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되요. 밖에 나가면 안 되잖아요, 하고 싶어도. 이 순간에 내 마음의 막힌 길을 뚫으려면 내 마음을 자꾸 관조하는 마음을 갖고 다라니를 외워야 돼요. 그러면 마음이 뚫려요. 다라니 기도의 가장 큰 공덕은 막힌 마음의 길을 뚫는, 지금 내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바람이 장애가 생기고 하는 것은 막힌 거예요. 애로불자가 되면 안 돼요. 10년, 20년, 30년 다녀도 마음을 깨트리지 않으면 애로불자예요. 길이 막혀있는 불자라는 거지요. 그럼 뭐가 되어야 하나? 에코불자가 되어야 해요. 자동차에 에코기능이 있어요. 파란 불이 들어오는 곳을 누르면 기름이 덜 든대요. 주행이 안정적으로 된대요. 그런 것처럼 자기 마음을 관해서 들여다 본 불자가 되어야, 에코불자가 되어야 해요. 에코불자가 되자. 그러려면 마음을 관해야 한다. 경전에 나와 있는 말씀을 적어왔는데, 잘 들어보세요. <불설 천수천안관세음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이라는 경전이 있어요. 거기에 나와 있는 경전구절인데 한번 읽어볼테니 들어보세요.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다라니를 수지하면 그 사람이 강이나 바다에서 목욕을 하여, 이 사람이 목욕한 물이 물속에 있는 중생들 몸에 닿게 되면 저들 중생이 일체 악업과 중죄가 모두 소멸되고 곧 연화국토에 태어나서 다시는 태(胎)의 몸이나 내지 습(濕), 란(卵)의 몸을 받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이 다라니를 수지 독송하는 자이랴. 또 이 다라니를 지송하는 사람이 길을 갈 때 큰 바람이 불어와 이 사람의 몸이나 옷에 스친 바람이 다른 중생들 몸에 스쳐 지나가면 이 중생은 일체 무거운 죄와 악한 업이 모두 소멸하고 다시는 삼악도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지 아니하며 항상 부처님 곁에 나게 되나니 마땅히 알아라. 그러니까 다라니 독송기도를 하고 나가서 바람이 딱 불었어. 그 바람이 다라니기도한 사람의 옷깃을 스치고 그 바람이 다른 사람의 옷깃만 스쳐도 그 바람 맞은 사람은 일체 악업이 소멸된다. 여러분 오늘 가시면서 운전하고 오셨다면 창문 좀 열고 가세요. 그래서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여러분의 옷을 스치고 나가면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이 다 모든 악업이 소멸되는 거에요. 코로나도 다 멸균되어버리는. 다라니라는 게 그만큼 수승한 공덕입니다. 이것은 1, 2년에 이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천 년 동안 이루어진 거예요. 여러분의 선배들, 여러분의 조상들이 그 옛날에도 다라니를 외었어요. 그 다라니 공력은 이 안에 가득한 겁니다. 이 공간 안에. 이 홀 안에. 그런데 이 다라니의 공덕을 갖다 쓰는 것은 내가, 다라니를 외우는 사람이 가져다 쓸 수 있어요. 서울에서 BBS불교방송을 들으려면 몇 번을 맞춰야되요? 101.9를 맞춰야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이 우주 안에 충만한 가득한 다라니 공덕은 여러분이 그 채널을 맞춰야 받아쓰는 거예요. 그게 다라니에요. 다라니는 항상 마음속에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지만 그 공덕을 가져다 쓸 수 있어요. 다라니의 이름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러분이 잘 아는 것은 <신묘장구대다라니>죠. 그 다음에 <광대원만 다라니(廣大圓滿)>라고 해요. 광대원만이라는 것이 크고 원만하여 소원을 성취해주는 다라니. 그리고 <무애다라니(無礙大悲)>, 무애란 장애가 없다는 거예요. 삶에는 어떤 것이 잘 이루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장애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뭔가 하려고 하는데 딱딱 막히고, 훼방하는 자가 생기고 그렇게 되면 힘들어요. 다라니를 외우면 그런 게 다 사라진다고 해요. <무애다라니>다. 그 다음에는 <구고다라니(救苦陀羅尼)>. 괴로움에서 건지는 다라니. 괴로움이 싹 사라진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연수다라니 (延數陀羅尼)>, 연수는 수명이 느는 것인데, 이것은 육체의 수명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법의 수명, 법의 생명이 늘어나는 거예요. 우리는 부처님을 만나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이 하나 있어요. 그게 법의 생명입니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육신의 생명이라면 부처님 만나면서 새롭게 움트고 싹튼 생명이 하나 있는데 그게 법의 생명이고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해요. 또는 법장(法藏)이라고 해요. 법의 창고. 그래서 우리가 천수경할 때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하잖아요. 법장이 열려라. 법의 창고가 열려라. 연수란 다라니를 열심히 외우는 사람은 마음의 법의 생명이 무럭무럭 자라나요. 그래서 내가 힘들고 괴로울 때 그 법의 생명이 나를 지켜주는 거예요. 그게 연수다라니, 연수의 공덕입니다. 그다음에는 <멸악취다라니(滅惡趣陀羅尼)>, 악취라는 것은 나쁜 갈래인데, 육도, 지옥, 아귀, 축생에 빠지는 걸 멸해준다. 그 다음에는 <파업장다라니(破業障陀羅尼)>, 업장이란 여래장의 반대말인데, 업장이란 신구의로 지은 업장들인데, 그런 악업들이 다 사라진다. 그리고 <만원다라니(滿願陀羅尼)>라고 합니다. 만원은 가득하다란 말이죠. 원을 가득채워준다. 그리고는 <수심자재다라니 (隨心自在陀羅尼)>라고 해요. 몸을 닦는데 있어서 장애가 없이, 처음 다라니기도 할 때 경험해 보셨겠지만, 다라니를 외우려고 하면 집에 초인종이 울리고, 다라니를 외우려고 앉으면 전화가 오고, 밥 먹자고 하고, 문자가 오고 하죠. 그런데 기도가 깊어지면 기도하려고 마음 먹은 순간에 탁 정리가 되요. 이런 경험들을 해봐야하는데. 내가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자꾸 장애가 생겨요. 그럼 더 열심히 해야해요. 어떤 분은 그런 분이 있어요. 어제 밤에 실컷 잤는데, 다라니만 읽으려고 하면 잠이 막 쏟아진다는 분이 있어요. 그런 경험 있으세요? 그런 것도 장애에요. 다라니기도 열심히 하면 이길 힘이 생겨요. 깊어지는 동시에 마음이 맑아지는 상태가 돼요. 마지막으로는 <속초상지자재다라니 (速超上地自在陀羅尼)>인데, 이건 좀 어려운데 단계가 올라가는 게 느껴지는 거예요. 자기의 수행지위가 올라가는 게 느껴져요. 이것은 스님들이 많이 성취하는, 수행을 열심히 하는 스님들이 수행의 단계가 올라가는 게 느껴지는 거예요. 다라니라는 것이 여러 가지 공덕이 있다. 우리가 지금 해냈다. 우리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줘야겠어요. 참 장하십니다. 다라니를 늘 지송해서 진관사 도량내에서, 마음의 정원이라고 그러죠? 마음의 정원에서 늘 승리하는 승리자, 산스크리트어로는 진아, 늘 마음의 승리자가 돼서, 성취하는 자가 돼서 늘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리면서 오늘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X2uruJQ_6Q&t=6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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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11월 14일 3재 법문
종범스님 2020-11-14
금일 도량 세연지고삼칠지신 천혼간도재자지심제청 지심제수 至心諦廳 至心諦受 화장세계 華藏世界 화장세계여 연화정토 蓮華淨土 연화정토여 안양극락 安養極樂 안양극락이여 종하출래 從何出來오 어디서 왔는가?나무아미타불 재를 모시고 공력(功力)이 많으세요. 공을 들이는 힘이 많다. 공 공자, 힘 력자. 공력이 많으시다. 그런 말씀을 드립니다. 첫 번째 법문이 뭐냐 하면, 화장세계(華藏世界), 꽃 화자, 창고 장자인데, 꽃은 공덕이란 뜻이에요. 공덕이 많은 세계라. 연화정토(蓮華淨土), 연화정토는 나쁜 것이 하나도 없는 세계란 뜻이에요. 연화도 깨끗하고 정토도 깨끗하고. 안양극락(安養極樂), 편안한 안자, 기를 양자인데, 여기서 기를 양자는 즐거울 락자과 똑같은 뜻이거든요. 안양을 안락이다. 편안하고 즐거움만 있다. 극락이다, 고통은 하나도 없고 즐거움만 있다. 그러면 이 세계가 어디서 왔느냐. 이 세계를 누가 만들었고, 지금 어디 있고, 어디서 왔는가. 종하출래(從何出來)오,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나왔나. 그런 말씀이었고요. 처음에 한 얘기는 오늘 삼재인데 날짜로 보면 삼칠이야, 7번이 세 번 들었다는 거죠, 삼칠. 언제 삼칠이냐. 세연이 지고, 세상 인연이 다함으로, 세상 인연이라는 것은 숨 쉬고 맥박 뛰고 생각하고, 수명과 체온과 의식이 세상 인연인데, 이것이 다한 것을 세연이 다했다. 물렀거라, 세연이 다하고 삼칠지신이라, 날짜를 말할 때 생신이라고 하는 것처럼, 스무하루 되는 날, 극락세계 가시라고 하는데, 극락세계는 대체 어디서 왔나. 그 얘기입니다. 원성무상최정각圓成無上最正覺 무상 최정각을 원성하여 정각공덕대지출正覺功德大智出 정각공덕으로 대지출하니 일체세간종종상一切世間種種相 일체세간의 종종상이 해인삼매소현물海印三昧所現物이로다 해인삼에서 나타났다.나무아미타불 극락세계는 불국토예요. 부처님이 계신 국토를 불국토라고 해요. 불국사라는 것도 다 극락세계를 말하는 거거든요. 화장사라는 것도 극락세계를 말하고, 극락암, 안양암(安養庵), 안양사(安養寺)도 다 극락세계를 말하는데, 불국토, 부처님에 계시는 곳이란 말이에요. 그럼 ‘부처님이 어떻게 해서 극락세계에 계시게 되나’ 그 의미인데, 원성무상최정각圓成無上最正覺하야, 무상은 가장 높다는 말이고, 최정각은 제일로 바른 깨달음인데, 원성, 둥글 원자, 이룰 성자, 원만히 성취하니, 거기서 뭐가 나왔나. 정각공덕대지출正覺功德으로 大智出이라. 바르게 깨달은 공덕으로 큰 대자, 지혜 지자, 큰 지혜가 나왔다. 지혜는 뭔가. 영지상지(靈知常知), 신령 령자, 알 지자, 신령스럽게 알고, 상지, 항상 상자, 알 지자, 항상 알고, 신광신통神光神通, 신비로울 신자, 빛 광자, 신비로운 광에, 신비로울 신자, 통할 통자, 신비로운 신통이다. 이걸 지혜라고 해요. 영지상지 신광신통을 깨닫기 전에는 의식인데, 의식은 대경인지하고, 자기 대상에 있는 경계, 형상들은 인식하게하고, 사량분별하고, 생각하고 헤아리고, 시비성향을 분별하고, 그게 의식인데, 이 의식이 편안해지고, 조용해지고 맑아지고 맑아지는 게 삼매인데, 그런 삼매의 관문을 닫고 닫고 그 기점에 이르르면 그 의식은 없어지고, 지혜광명이 출현하는데, 그걸 깨달음이라고 해요.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의식이 지혜로 바뀌는 것이다, 그거지. 그것을 전식성지(轉識成智)라고 해요. 식을 전환시켜서 지혜를 성취시킨다. 그러면 이 지혜가 나타나면 뭘 아느냐. 일체 만법이 오직 마음에 있는 걸 알아요.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모든 물건이 자기 마음이라는 것을 알면 깨달은 거고, 자기 마음과 상관없이 모든 물건이 있다라고 하면 생각인 거예요. 지혜라는 것은 제법이 유심이라. 오직 마음이라는 걸 아는 게 지혜고, 모든 형상법이 대상으로 인식이 되고, 그 대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불편하면 그건 의식이다 이거죠. 그래서 뭐가 깨달음이냐. 오직 마음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도대체 뭔 말인지, 불가사의인데요. 마음은 항상 있는 건데 모를 뿐이죠. 뭐가 마음이냐, 전부가 마음이에요. 책상을 볼 때도 그냥 책상으로만 보면 의식인데, 이 책상을 보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보는 마음은 잊어버리고 책상만 쫓아가는 거예요. 이걸 의식의 분별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 의식은 생멸이에요. 났다 죽었다, 났다 죽었다. 그런데 생기는 생각은 아는데, 사라지는 생각은 몰라요. 이 생각이 생기기만 하는 게 아니고 사라지거든요. 생각이 생길 땐 알아, 그런데 사라질 땐 몰라요. 그래서 맨날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이 의식인데, 이걸 세간(世間)이라고 그래요, 세간. 극락은 세간이 아니라 극락인데, 극락은 생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혜에서 왔다. 그게 극락세계에요. 글자를 보더라도, 글자도 마음이 있는 거예요. 이걸 신령스럽게 알고, 영지, 항상 알아요. 아는 작용이 일어나도 그대로 지혜고, 안 일어나도 지혜고.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이렇게 돼요. 그게 반야인데, 반야 지혜. (물컵을 가르키며)이것도 그릇인데, 이걸 잡으면 잡는 마음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걸 보는 마음이 있어요. 이게 통째로 마음이에요. 그런데 그릇인 줄만 알지, 마음이 있는 걸 모르는 걸 생각이라고 해요. 그래서 삶과 죽음을 느끼는데, 삶과 죽음만 알고 삶과 죽음을 느끼는 영지상지, 신광신통 그게 극락세계인데요. 아는 마음은 극락세계고, 그 느끼는 대상을 쫓아가는 의식이 있다. 석가모니는 그것을 알았다는 거예요. 의식으로 분별하면 생로병사고요, 그 아는 마음에서 자유자재하면 극락세계에요. 아주 간단해요. 그래서 지혜로 살면 극락세계인데, 생각으로 살면 생로병사다. 그러니까 온 가족이 공력을 많이 키우면서 극락세계로 보내는 걸 천도(薦度)라고 그러는데, 불교는 천도지 추모(追慕)가 아니에요. 유가에선 추모를 해요. 추모는 뭐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계실 때 그대로 의식을 대접하고 하는 거예요. 그게 추모예요. 불교에선 천도에요. 천도란 뭐냐. 생로병사 의식의 세계에서 극락세계 지혜의 세계로 잘 가십시오. 이게 극락왕생이거든요. 그래서 천도는 극락왕생이고, 일반제사는 생전추모다. 생전의 모습을 다 추모해서 추모하는 기간에는 고금이 상봉이라, 살아계실 때 그 부모하고 살아있는 후손하고 상봉하는 것을 제사라고 해요, 고금상봉. 그래서 제사 지낼 때 고대로 평소처럼 하는 거예요. 그 순간만큼은 고금이 상봉하는 거예요. 그러면 ‘생로병사 의식세계에서 극락세계 지혜세계로 잘 가십시오.’ 이게 문화의 차이점이에요. 그래서 지혜가 되면 지혜는 생각을 일으켜서 되는 것도 아니고, 안 일으켜서 안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지혜가 항상 선정에 들어있고, 항상 광명을 일으킨다. 이걸 해인삼매海印三昧라고 하는데요. 해인이란 바다 해자, 도장 인자인데, 바다가 일부러 하늘에 있는 모양들을 담으려고 해서 그림자가 비치는 게 아니라, 저절로 바다에는 온갖 그림자가 다 비치는 거지, 백지에 도장 찍는 거와 같이 나타난다는 그 소리예요. 하얀 종이에 도장 찍으면 종이는 안 보이고 도장만 보이거든요. 바다에 하늘에 있는 모양들이 다 비치면 바닷물은 안 보이고 모양만 보인다. 모양 모양 하나하나 다 바닷물인 거예요. 이렇게 바다가 있다 보면 물속에 온갖 그림자가 다 있을 거 아니에요. 거기 바다 속에 별이 있다고 건지러 바다에 들어갔다면 고생만 하지 아무 소득이 없어요. 왜냐하면 물속에 비친 별들이 바닷물이기 때문에. 그래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게 바다의 그림자와 같아서 오직 보고 듣는 마음뿐이고 보여지고 들려지는 것 자체가 없다. 그걸 해인삼매라고 해요. 바다가 일부러 그림자를 드러내려고 애쓴 것도 아니고 안 드러내려고 피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저절로. 하늘에 있는 별이 바닷물 속으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바닷물이 하늘로 기어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별이 솟아 올라간 것도 아니고, 떨어져 빠진 것도 아닌데, 그냥 환히 비친단 말이지요. 그런데 언뜻 보면 바다 속에 해와 달과 별들이 다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사실은 물이지 거기엔 없다. 그냥 생각으로 보면 나무는 나무대로 따로 있고, 흙은 흙대로 따로 있는 것처럼 느꼈는데, 전부 지혜광명 속에 한갓 그림자처럼 비춰질 뿐이고 쫓아가면 색즉시공(色卽是空) 다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뭐냐. 오직 지혜광명에는 신비롭게 밝고 항상 밝고 신비롭게 빛나고 신비롭게 통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이게 극락세계고 이게 깨달은 세계에요. 그래서 일체세간종종상(一切世間種種相)이, 세간의 가지가지 모든 모양이 해인삼매소현물(海印三昧所現物)이라, 해인삼매에 나타나는 물건이다. 이래서 불교가 어렵다고 하고, 뭔가 들어보면 알 듯도 한데 돌아서면 몰라요. 그건 사실이에요. 왜냐. 생각으로 해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극락세계를 체험을 하려면 생각을 거둬, 섭심(攝心), 거둘 섭, 마음 심, 경계를 인지하고 분별하는 생각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으면 순간이라도 생각에서 지혜로 가는 순간체험이라도 할 수 있는데, 그 극락세계를 체험하는 것, 생각으로는 안 되고 생각을 가둬서 지혜로 일순간이라도 들어가게 되면 그때 극락세계를 살아서 체험하는 것, 그게 극락체험훈련이죠. 돼요. 근데 왜 안 되냐. 밖의 것을 분별해서 안 되고 조금 하다 보면 잠이 들어서 안 돼요. 이 두 가진 안 돼요. 잠도 들지 말고 밖의 물건도 쫓아가지 말고, 딱. 이것을 보관삼매(普觀三昧)라고 해요. 넓게 보는 삼매에 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에 극락광명이 나타난 걸 체험할 수 있다. 무상무공무불공無相無空無不空 무상무공하고 무불공하며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 무거무래하고 무주하니 수수즉성무불성隨須卽成無不成 구하는 대로 이루어서 법계장엄보변만法界莊嚴普遍滿이로다 법계 장엄 끝이 없다.나무아미타불 이 생각에서 지혜광명을 딱 들어가 보면 지혜광명으로 보이는 세계가 일체형상이 형상이 아니에요. 무상. 형상은 생각이 만들어 낸 사량분별이에요, 형상. 그러면 형상 없는 게 따로 있느냐. 따로 있는 걸 공이라고 하는데 따로 있는 게 없어요, 무상무공이에요. 또 공한 게 없느냐. 있느냐. 공한 것도 없어요. 이게 첫 번째 맞이하는 지혜의 경계에요. 무상무공무불공(無相無空無不空), 여기에 생각은 끼어들지 못해요. 생각은 살아있는 공이고, 또 공은 어떻다, 분별인데 무상무공무불공, 상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닌 것도 없다. 이게 지혜가 맞이하는 세계에요. 이게 극락의 텃밭인 거예요. 상이 상대로 딱 정해져 있으면 극락이 나올 수가 없어요. 상이 상이 아닐 때 극락일 수 있는 거예요.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라, 극락세계는 어디로 가는 게 아니에요, 어디서 오는 게 아니에요, 머무는 게 아니에요. 무상무공무불공 무거무래역무주. 요즘 사람들 한문 안 배우는데, 법문을 한문으로 하냐고 원성이 자자해요. 근데 왜 그러냐. 이렇게 가닥을 치지 않고 우리말로만 하면 싱거워서 이게 했는지 안 했는지, 사람은 있는데 이름 없는 것과 같아서 양이 안 차서 그래요. 무거무래역무주,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다. 무거무래역무주를 말하지 않고,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다, 싱거운 일이에요. 그것도 한자가 우리 글자가 돼버렸거든요, 이미. 외국 글자가 아니에요. 우리 글자가 돼버린 거예요. 그게 지혜의 세계에요. 근데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것은 원력과 신통이 있는 거예요. 그런 지혜의 세계를 맞이하는 순간에 뭔 생각이 또 나오냐 하면, 아, 이런 극락세계가 이렇게 뚜렷한데 이걸 모르고 낮이나 밤이나 고뇌에 시달리는 중생은 얼마나 괴로울까. 이런 자부심이 나와요. 이런 중생을 극락세계로 인도해야겠다는 원력심이 나와요. 이걸 비원이라고 해요. 정각비원(正覺悲願). 바르게 깨달으면 자비와 원력이 저절로 나와요. 해인삼매처럼. 정신이 건강한 것은 좋은 일 하려고 마음이 생기는 게 건강한 거예요. 남을 어떻게 해야되겠다는 것은 건강한 게 아니에요. 비원이 있을 때 건강한 정신인 거예요. 비원. 자비와 원력. 원력은 이루려고 하는 원하는 힘이잖아요. 자비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자기처럼 자기화시키는 거잖아요. 부처님의 비원. 어떻게 되느냐. 법계장엄보변만法界莊嚴이普遍滿이라, 법계를 공덕으로 장엄이란 온갖 걸 꾸미는 게 장엄인데, 중생들이 다 극락세계로 오를 때 공덕으로 온 법계를 장엄하게 되는데, 그래서 극락에는 없는 게 없는 거예요. 보변만이라, 편자를 불교한자로는 변으로 읽어요. 보편이라고 안하고 보변이라고 해요. 참 희안하지. 불교한자의 음이 일반한자와 음이 틀린 게 많아요. 도장(道場), 장자가 장소 장자인데, 불교한자에서는 도량으로 읽어요. 태권도에 가면 도장이라고 읽는데, 절에서는 도량이에요. 이렇게 틀리는 발음이 상당히 많아요. 그거 하나 모르면 저 사람 불교 모른다고 딱지 붙이기 쉬워요. 아무것도 아닌데. 보변만이라, 보자는 끝도 없이, 변자는 한계도 없이, 만자는 가득하다, 충만하다. 보변충만을 보변만이라고 해요. 극락세계는 그렇대요. 온갖 공덕장엄이 보변충만해요. 그게 전부 불국토다. 그래서 그 지혜광명은 끝이 없어서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미타불은 석가모니처럼 부모가 없어요. 그거 묻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고요. 석가모니는 아버지는 정반왕이고 어머니는 마야부인인데, 아미타불의 아버지는 누구고, 어머니는 누구냐. 묻는 사람이 없었어요. 이상하다. 석가모니는 능인(能人) 능할 능자, 사람인자. 이렇게 무상정각을 이루는 일을 성취했다고 해서 성취한 사람을 능인이라고 해요. 가능할 수 있는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능인. 그런데 아미타불은 능인이 아니에요. 그럼 뭐냐. 석가모니가 깨달은 지혜광명의 무량수를 아미타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면 돌아간다는 이야긴데, 아미타불의 세계로 돌아간다. 생로병사의 의식세계에서 지혜광명의 극락세계로 간다. 입으로 말을 하고 생각으로 원을 세우는 순간에 이미 갔는데, 구칭의념이라고, 입으로 칭송을 하고 생각으로 염원을 하는 순간에 이미 갔는데, 이 생각이 의심하고 부정하니까 갔어도 간 걸 전혀 못 느끼는 거예요. 나무아미타불 한번 입으로 칭송을 하고 한번 마음 생각하면 이미 간 거예요.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 무상무공무불공(無相無空無不空) 이 세계에서 벌써 갔는데 못 느끼니까 “극락세계 정말 있을까요? 어떡하면 가는데요?” 전부 생각으로 사량분별해서 극락을 자꾸 막는 거예요, 막아. 어떡해요. 그런 생각 안 날 때까지 닦을 수 밖에. 방법이 없어요. 일념공덕으로 왕생극락이라. 한번 생각하는 공덕으로 극락왕생하는 건데, 생각이 인정을 하지 못하고, 생각이 만족을 하지 못하니까 해도 해도 불안한 거예요. 극락이란 그런 거예요. 여래보현신如來普現身 여래가 널리 몸을 나타내어 변입어세간遍入於世間 빠짐없이 세간에 드러서 수중생락욕隨衆生樂欲 중생의 욕락을 따라 현시신통력顯示神通力이로다 신통력을 나타내도다. 나무아미타불(화엄경, 여래 현상품)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나무아미타불. 이미 갔어요. 그런데 우리 생각은 못 갔어. 세계는 갔는데. 그래서 부처님이 모든 것은 마음뿐이다라는 것을 알고 이 물질이라는 것은 무상무공무불공 무거무래역무주라, 그러나 이것을 일체중생들은 모르니까 자비원력으로 중생을 인도하겠다. 뭘로 인도하냐, 신통으로 인도하는데, 자비원력 신통자재, 이게 불교용어인데, 신통자재란 뭐냐하면, 생각으로 보면 육법세계와 불법세계, 과거,미래, 현재가 있는데, 지혜로 보면 신통이라는 것은 이 순간에 현재도 되고 미래도 되고 과거도 되는 거예요. 생각은 과거는 과거 따로, 현재는 현재 따로, 미래는 미래 따로. 지혜로 보면 이것 저것이 전혀 다르지 않다. 무거무래역무주. 그래서 신통은 이곳을 떠나지 않고 저곳에 가요. 그걸 신통이라고 해요. 요새 문명의 발달로 교통수단을 계속 고속화시키려고 애를 쓰는데, 신통으로 보면 답답해요. 여기서 안 떠나고 저기 가는 것을 배워야 돼요. 아, 이것 참. 사업은 안 될텐데. 불이차방하고 즉도피방이라. 차방을 떠나지 않고 바로 피방에 도달하는 것을 신통이라고 해요. 그래서 부처님이 가만히 앉아계시지만, 신통으로 여래보현신(如來普現身) 여래가 널리 몸을 나타내어 변입어세간(遍入於世間)이라 세간에 두룻이 다 들어간다 이거예요. 화엄경 여래출현품 법문인데, 그래서 수중생락욕(隨衆生樂欲)하야, 중생이 즐거워하고 욕심내는 것을 따라서 현시신통력(顯示神通力)이라, 나타낼 현, 보일 시, 신통력을 나타내 보인다. 이것이 부처님의 자비원력이고, 신통자재거든요. 그리 가시면 되는 거예요. 어떻게 가냐. 신통력으로 가시는데 오직 생각을 믿는 사람들이 못 믿을 뿐이에요, 인정 못 할 뿐인 거예요. 우리가 극락 속에 안에 살고 있거든요. 그런데 생각도 극락을 알지 못하고 믿지를 못해요. 여기 안 떠나고 가고자 하는데 바로 가요. 중생이 볼 때는 석가모니가 뭐 하늘에서 내려왔다, 룸비니동산에서 태어났다, 구시라성에서 돌아가셨다, 이건 생각으로 보는 건데, 신통은 어떻게 보냐. 하늘에서 내려오기 전에, 하늘을 떠나기 전에 여기에 도착한 거예요. 그리고 태어나기 전에 벌써 열반에 든 거고. 열반에 든 상태로 태어난 거고. 이것이 신통이에요. 지난 번보다 법문시간이 길어지는 거 같은데, 생각으로 보면 시간이 길고 짧은데, 지혜로 보면 시간의 장단이 없어요. 길고 짧은 게 없어. 지금 억지로 하는 거여. 지혜시간으로 억지로. 무량겁이 일찰나, 그게 지혜의 시간이에요. 일찰나가 무량겁. 한마디만 더하고 오늘 법문을 마치면, 과거, 현재만 해도 그래요. 법에서 어떻게 가르치냐 하면 오대를 중심으로 삼세를 나누는데, 오대삼세, 자기가 있고, 자기 위에 부모가 있고, 부모 위에 조부모가 있고, 또 자기가 있고, 자기 밑에 자녀가 있고, 자녀 밑에 손자녀가 있는데, 이게 오대거든요. 근데 나로 보면 나는 현재고, 부모는 과거고, 조부모는 과거의 과거가 되는 거예요. 또 나는 현재고, 자녀는 미래고, 손자녀는 미래의 미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가 볼 때는 내가 미래가 되는 거예요. 내가 볼 때는 부모가 과거가 되는데. 자녀가 볼 때는 내가 과거가 되는 거예요. 손자녀가 볼 때는 나는 과거의 과거가 돼버려서, 그래서 과거현재미래는 정해진 게 아니에요. 무거무래역무주여. 그래서 극락자재하게 되는 거죠. 공력을 이렇게 잘 쓰시니 영가께서 극락왕생하시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게 잘 믿고 하시면 그것이 무량공덕이 되는 거죠.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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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10월 31일 영가 초재 법문
종범스님 2020-10-31
금일 초재이신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至心諦廳 至心諦受 백해괴산百骸潰散 온몸은 흩어져서 귀화귀풍歸火歸風이나 화풍으로 돌아가나 일물장영一物長靈 한물건은 길이 신령해서 개천개지蓋天蓋地로다 하늘땅을 덮음이여!!나무아미타불 재를 모신다고 수고들 많이 하십니다. 재는 극락세계 가시라고 하는 일인데, 극락세계에 어떻게 가냐. 날 생자(生), 몸 신자(身), 태어날 몸이 있고, 깨달을 각자(覺), 몸 신자(身), 깨닫는 몸이 있는데, 태어날 몸은, 몸은 태로부터 태어나는데, 깨닫는 몸은 새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태어나요. 태없이 태어나는 몸이 각신인데, 그래서 어떻게 가르치냐. 백해(百骸), 백 백, 몸 해자, 몸에는 여러 가지 부분 요소가 있는데, 여러 가지 몸이 괴산(潰散)이요. 흩어질 괴자, 흩어질 산자. 이 몸이, 태어난 몸은 다 없어져요. 생신, 생신은 다 없어져요. 이 몸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몸, 이 몸이 태어났을 때도 있던 몸, 이 몸이 흩어진 다음에도 있던 몸인데, 그 몸을 영신(靈身)이라고 그런다. 묘한 몸이라고 해서 묘체(妙體)라고 그런다. 그것은 하나의 신령스럽고 밝다. 그래서 일령(一靈)이라고 해요, 한 일자, 신령 령자. 한 물건 신령스러운 것은 길이길이 신령스러워서 하늘도 꽉 차고, 땅도 꽉 찬다. 그래서 그 영신이 아는 것을 영각(靈覺)이라고 하거든요. 신령 령자, 깨달을 각자. 또 생신이 아는 것을 생각이라고 해요. 우리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데, 평생 이 태어난 몸에만 의지해서 살기 때문에 생각, 영신은 영각이다. 신령스럽게 알아요. 신령스럽게 아는 영신, 영각이 머무는 곳이 극락세계에요. 생신, 생각이 머무는 곳을 사바세계라고 하는데, 사바세계는 특징이 고통과 즐거움이 늘 함께 있어요. 고통 없이 영원하리라고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그것은 잠시 욕심이고, 이 사바세계는 생신, 생각이 머무는 곳이라 고통이 있으면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으면 고통이 있고. 극락세계는 안 그래요. 무구정토 無后淨土 청정한 정토 실상상주 實相常住 실상이 항상하는 화장찰해 華藏刹海 화장찰해의 극락세계 極樂世界는 극락세계는 수광무량 壽光이無量하고 수명과 광명이 무량하고 복덕구족 福德이具足하고 복덕이 구족하고 수수원성 隨須圓成하니 구함을 따라 원만히 이루니 안락무궁 安樂이無窮이로다 안락이 끝이 없도다.나무아미타불 이 신령스러운 몸, 신령스럽게 아는 지혜가 머무는 곳은 무구정토(無后淨土)라. 없을 무, 더러울 구자인데, 더러운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냥 청정국토여. 실상상주(實相常住)해요. 진실상이 항상 머문다. 화장찰해(華藏刹海)라, 화장이라는 것은 꽃 화자, 감출 장자인데, 꽃은 공덕이고, 감출 장자는 무진장이란 소리예요. 공덕이 무진장 한 곳이 극락세계예요. 그리고 찰해라는 것은 세계라는 찰자, 바다 해자인데, 이 무진장한 공덕이 많고도 많다. 이게 화장찰해거든요. 그 세계가 극락세계인데, 극락은 이게 뭐냐. 고통이 있으면 즐거움이 있고 그게 아니고, 무고유락(無苦有樂)이라, 고통은 없고 즐거움만 있어요. 무고, 고통은 없어. 유락, 즐거움만 있어요. 그걸 조금 자세히 말해본다면, 수광壽光이 무량無量하고, 이 신령스러운 몸, 신령스러운 마음은 수명과 광명이에요. 수명이 무량하면 죽음이 없고, 광명이 무량하면 어두움이 없다. 그래서 수명과 광명이 한량이 없고. 복덕(福德)이 구족(具足)하고, 복덕은 장애가 없고 여러 가지 선공덕을 복덕이라고 해요. 무장애 선공덕. 복이 없는 사람은 장애가 많아요. 복이 있으면 장애가 없어. 선공덕은 여러 가지를 이룰 수 있는 능력. 이 복덕이 다 갖추어진 세계가 극락세계고. 수수원성隨須圓成이라, 따를 수, 요구할 수, 필수라는 수자인데, 수수, 바라는 바 따라서, 바라는 대로, 바라는 희망에 따라서, 희망대로, 둥글 원, 이룰 성, 원만하게 다 이루어지는 데가 극락세계다. 수수원성이라. 그러니 안락(安樂)이 무궁(無窮)이라. 사바세계는 편안해도 즐겁지 않아요. 오래 쉬라고 하면 못 쉬어, 불안해서. 그런데 극락세계는 편안하고 즐거워요. 편안할 안자, 즐거울 락자. 그 편안하고 즐거움이 끝이 없다. 무궁하다. 그걸 극락세계라고 해요. 수광이 무량하고 복덕이 구족하고 수수원성하니, 희망하는 대로 원만히 이루어지니, 안락무궁이라, 편안하고 즐거움이 끝이 없다. 몽식주몽 夢識은住夢하고 몽식은 꿈에 머물고 의식주경 意識은住境하고 의식은 세간에 머무나 영식무주 靈識은無住하니 영식은 머무는 데 없으니 적적광명 寂寂光明이로다 자취 없는 광명이로다.나무아미타불 사람에게 꿈꿀 때 느끼는 걸 꿈 몽자, 인식할 식자, 몽식(夢識)이라고 하거든요. 평상시에 느끼는 것을 생각 의자, 인식할 식자, 의식(意識)이라고 하거든요. 꿈꾸면 몽식이고 꿈 깨면 의식이고. 그런데 이 꿈의 인식은 꿈에만 머물러요. 아무리 좋은 꿈을 꿔도 꿈 깨면 안 머물러요. 그게 몽식이에요. 그런데 의식은 세 가지만 머물러요. 세 가지라는 것은 우리 몸하고, 사람하고, 물질하고 이렇게 세 가진데, ‘저 사람 뭔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알 필요도 없어요. 몸 생각 아니면, 사람 생각 아니면, 물질 생각하고요. 고향 생각을 한다든지, 친구 생각을 한다든지, 몸 관리 생각을 한다든지, 뻔한 거예요. 궁금할 거 하나도 없어요. 그게 의식이 머무는 세계인데, 그걸 몸과 사람과 물질을 통틀어서 불교에서는 경계 경자가 있는데요, 경(境)이라고 해요. 근데 의식은 항상 몸 아니면 사람, 물질, 몸, 사람, 물질로 돌아다녀, 밖에만 있어요, 늘. 늘 의식은 밖에만 돌아다녀요. 그런데 이 몸과 의식이 있기 전부터 있는 그걸 영식(靈識)이라고도 하고, 영각이라고도 하는데, 영식, 영각, 신령스럽게 아는 것, 그건 이 몸이 있기 전부터 있어서 본래면목이라고도 하고, 또 무주진인(無位眞人)이라고도 해요, 머뭄이 없는 참사람이라고. 이거는 태어난 사람이고, 색인이고, 이 몸 나기 전부터 있던 참사람이 있어요, 그게 영각인데, 그 영식, 영각, 그 참사람은 머무는 데가 없어요. 무주라, 무주(無住). 몸에도 안 머물고, 사람에도 안 머물고, 물질에도 안 머물고. 과거에도 안 머물고, 현재에도 안 머물고, 미래에도 안 머물고, 무주. 과거현재미래의 지배를 안 받고, 몸과 사람과 물질의 지배를 안 받아요. 그래서 이걸 해탈(解脫)이라고 하고, 고요하다고 해서 열반(涅槃)이라고 해요. 또 자재(自在)라고 해요, 지배를 안 받는다고 해서 자재. 해탈도 머묾이 없는 무주고, 열반도 머묾이 없는 무주고, 자재도 머묾이 없는 무주고. 무주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 무주는 신령스런 몸, 신령스런 마음, 영식영각인데, 적적광명(寂寂光明)이라, 자취가 없어요. 고요할 적자, 고요할 적자, 적적. 그런데 항상 빛난다. 광명이라. 이 적적광명 영식영각이 극락세계 가고, 극락세계 가는데 수량이 무량하고 복덕이 구족하고, 화장찰해 극락세계에서 안락을 수용하는 것이 그게 극락 가는 도리고, 그렇게 해드리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정성을 다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법문 다 마쳤습니다.